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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02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6월2일 서울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6월 월례강연회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오랫동안 미국 민주당 성향을 뜻하는 ‘리버럴’(liberal)을 어떻게 번역하는 게 적절한지 혼선이 있었다. 그런 혼선은 이제 사라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진보’가 사실은 ‘리버럴’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었다. 사회주의와 선을 긋고 ‘분배와 정의’를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옹호하는 것, 이게 루스벨트 민주당의 ‘진보주의’(liberalism)고, 노 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에서 말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한다. 정통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한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정리해고, 구조조정, 민영화, 개방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 주장한다. (…) 한국은 아직도 보수의 나라다. 한국은 진보의 시대가 필요하다. 민주당은 진보 진영인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노선은 성공할 것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작 <진보의 미래>에 담긴 내용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책의 저술에 매달렸다. 이 책만큼 ‘진보’란 무엇인지, 그 개념을 정리하고 설명한 책을 찾기도 쉽지 않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 진보 정권과 보수 정권은 어떻게 다른가, 진보 진영 내부의 다양한 시각과 내부 비판 등에 관해 노 전 대통령의 솔직한 생각과 고민이 담겨 있다. 집필에 들어간 배경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세계의 역사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역사는 진보주의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사회적 논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진보’를 얘기한 게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진보’와 ‘진보주의’에 대한 생각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혔다. 대표적인 게 2007년 6월의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참여정부는 진보를 지향하는 정부”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참여정부의 진보는 민주노동당의 진보와 어떻게 다른가. ‘시장친화적인 진보’고 ‘개방 지향의 진보’다. ‘배타하지 않는 자주를 주장하는 실용적 진보’다”라고 말했다. 4시간 가까운 포럼 연설은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진보’가 논쟁거리가 된 건 아니었다.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등 대선 주자들을 언급한 게 선거법 위반이란 논란에 휩싸였다. 기자실 폐쇄 등 참여정부 정책을 일방적으로 옹호했다는 비판이 여당인 열린우리당 안에서도 터져 나왔다. 그 시기 노 대통령에겐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지던 터라, ‘노무현의 진보’에 주목한 언론은 없었다. 왜 그렇게 ‘진보’에 몰두했을까. ‘진보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에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더욱 천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천호선(현 노무현재단 이사)씨는 “노 대통령이 ‘진보’를 말한 건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만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천 이사는 “대통령이 ‘보수에선 나를 좌파라 하고 진보에선 신자유주의자라고 하니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인가 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일종의 풍자였다. 그런데 이 말을 두고 보수 언론은 또다시 대통령을 엄청나게 비난했다”고 말했다. <진보의 미래>란 책은 재임 시절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뒤 봉하마을로 내려가서 ‘다음 카페’에 비공개 토론방을 하나 열었다. 방 이름은 ‘진보주의 연구모임’이었다.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교수, 학자 등 20여명이 토론방에 참여했다. 토론방 관리는 노 전 대통령 비서관이던 김경수 현 경남지사가 맡았다. 김경수 경남지사는 “대통령이 가장 많은 글을 토론방에 올렸다. 대통령이 어떤 고민을 정리해서 올리면 참여자들이 그에 대한 의견을 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책 제목 <진보의 미래>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원고를 정리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주제어 중 하나를 골라서 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핵심 기준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봤다. 성장과 분배, 감세와 복지, 노동의 유연화, 민영화와 탈규제, 개방 등의 핵심 이슈가 모두 국가 역할에 관한 논쟁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 진영이 노동과 복지, 진보의 가치 자체의 정당성을 적극 주장하기보다 그것이 경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거나 지속 가능한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방어적 수세적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신자유주의 자체를 터부시하는 진보 진영의 태도를 ‘교조적’이라고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정책 한두 가지를 채택했다고 ‘보수’로 볼 수 없고, 노동 환경이 변화하니까 노동운동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는 나쁘다, 개방은 신자유주의다, 고로 개방은 나쁘다, 개방·민영화·노동 유연화의 일부 정책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규정하고 나쁘다는 논리로 가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정통 진보 진영은 노 대통령이 구조조정, 민영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개방 정책을 받아들였기에 ‘진보에서 이탈했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감세와 복지 축소를 받아들이냐 여부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핵심 기준”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분명한 ‘진보 정권’이라고 생각했다. 김경수 경남지사는 “노 전 대통령을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건 잘못이라고 본다. 그러면 신자유주의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이게 불분명하다. 그런 비판이 진보 진영 내부의 건전한 토론을 가로막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논란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은 진보주의라는 게 딱 정해진 게 아니라 시대에 맞게 살아 움직이는 걸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천호선 이사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듬해인 2010년, 민주당에 들어가지 않고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함께 국민참여당 창당을 주도했다. ‘친노’ 색채가 강했던 국민참여당의 행로는 더불어민주당이 어떻게 ‘진보’의 중심부로 다가섰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국민참여당은 2011년엔 엔엘(NL), 피디(PD) 계와 함께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이 부정경선 파문으로 분열된 2012년 가을, 참여당 계열 인사들은 탈당해 정의당에 합류하거나 민주당 복귀를 택했다. 천 이사는 “민주당의 가치와 정책이 노 전 대통령의 진보적 지향과는 거리가 있다고 봤고, 그래서 ‘합리적 진보정당’을 추구하는 국민참여당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어느 순간 재야 운동권과 진보정당의 ‘진보’와 노 대통령의 ‘진보’ 간격이 크게 줄어들어 버렸다”고 말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이들(친노)이 민주당의 진보파를 형성하면서 민주당 좌표가 왼쪽으로 이동했다. 민주당 내부엔 오랫동안 안철수 전 대표와 같은 중도보수를 표방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런 움직임이 사그라들고 전체적으로 당의 이념적 좌표가 좌클릭했다”고 말했다. 그 점에서 4·15 총선 결과에 대한 <시사인>·한국리서치 여론조사 결과는 눈길을 끈다. 민주당 지지자 중 ‘전통 지지층’과 최순실 사태 이후(촛불 이후) 민주당 지지로 들어온 ‘새 지지층’을 비교한 조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를 물었는데 ‘전통 지지층’의 96%, ‘새 지지층’의 86%가 호감을 표시했다. <시사인>은 “(전통 지지층의) 96%보다 ‘새 지지층’의 86%가 더 인상적이다. 노무현이란 상징이 민주당의 핵심 전략자산이란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진보’의 폭과 기반을 확장시킨 건 맞다. 그러나 그게 정치적 결집이란 현상으로 표면화한 건 2016~17년 박근혜 탄핵정국 시기의 ‘촛불’을 거치면서다. 진보를 역사 또는 사회가 합리성과 민주성에 기초해 발전하는 개념으로 본다면, 촛불을 든 시민들의 ‘진보성’이 그 이후 한국 사회를 진보 의제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미국 민주당 성향을 뜻하는 ‘리버럴’(liberal)을 어떻게 번역하는 게 적절한지 혼선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도 “진보주의와 자유주의가 자꾸 혼동이 되고, 미국에서는 영어로 ‘자유주의’(liberalism)일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진보주의’로 번역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혼선은 이제 사라졌다. 노 전 대통령이 말했던 ‘진보’가 사실은 ‘리버럴’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었다. 사회주의와 선을 긋고 ‘분배와 정의’를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옹호하는 것, 이게 루스벨트 민주당의 ‘진보주의’(liberalism)고, 노 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에서 말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다음 회엔 ‘루스벨트 뉴딜과 미국 민주당 시대’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사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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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8, 2020 at 02:59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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